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파스샹달 전투 (문단 편집) == 배경 == [[조제프 조프르]]의 뒤를 이은 [[프랑스군]] 사령관 [[로베르 니벨]]이 내놓은 [[니벨 공세]](1917년 4월~5월)[* 엔 강에 구축된 [[독일 제국군]] 방어선을 뚫기 위한 [[프랑스군]]의 대규모 공세로서 일부 지역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지만 18만 7000명의 프랑스군 사상자가 나왔고 곧 대규모 항명 파동이 일어나 니벨이 물러나고 [[필리프 페탱]]이 프랑스군 총사령관이 된다.]가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는 데 실패한 무의미한 [[소모전]]이 되자, [[모랄빵|프랑스군은 전투 의지를 상실하였고,]] [[영국]] [[영국 총리|총리]]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David Lloyd George)는 영국 원정군만으로 공세에 나서는 건 어리석은 짓이라 판단했다. 하지만 영국 원정군 사령관 더글러스 헤이그 장군은 결정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는 자신감이 있었고 곧이어 있을 [[미군]]의 참전과 더불어 주도적인 압박에 실패할 경우 프랑스군이 독일군에게 치명타를 받을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다. 더불어 [[1918년]]에 독일군을 패배시키기 위해서라도 독일의 전력을 반드시 소모시켜야 했다.[* 1917년 6월에 있었던 메시느에서의 작은 승리로 독일군이 약화되었다는 착각을 한 탓도 있긴 있었다.] 헤이그는 [[플랑드르]]에 위치한 항구들을 일소한다는 이른바 ‘북부 작전’을 계획했고 계획의 타당성을 설명하여 [[유보트]]로 골치를 앓던 제1해군경 존 젤리코에게서 강력한 지지를 받았으나[* 정작 더글라스 헤이그는 존 젤리코를 '''늙은 여자'''같다고 디스했다...], 로이드 조지 전시내각은 7월 21일이 되어서야 최종 승인을 내렸다. 설상가상으로 헤이그는 만약 인명 피해가 공세로 거둘 수 있는 실질적인 성과를 상회할 경우에는 공세를 중지시킬 수 있다는 통지를 받았다. 로이드 조지의 이런 조치는 타당한 측면이 있었다. 지난 3년 간의 전쟁으로 소득은 적은 데 반해 갈수록 인명 피해는 기하급수적으로 느는 바람에 인력 동원에 한계가 다가오고 있었고 게다가 [[미국]] 역시 슬슬 참전하는 시기(미국은 1917년 4월 6일에 대독선전포고를 했다)에 벌어지는 성공을 확신하기 어려운 작전에 큰 피해를 감수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로이드 조지는 평소 [[의회]]와 당을 휘어잡던 모습과 다르게 "계속해서 적과 교전할 필요가 있다"며 작전에 자신만만한 헤이그를 말로 제압하는 데 힘겨워했고 결국 견해를 받아들였다. 1917년 6월 헤이그는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건너가 공세에 관련하여 로이드 조지에게 추궁을 받았다. "다른 공세는 다 실패했는데 이번 공세는 어찌하여 성공할 수 있는가?", "프랑스인들이 지원할 것인가?", "'사기가 저하되어 있다'는 증거가 무엇인가?", "미국인들을 기다려 연합국의 자원을 이탈리아에 돌리는 것이 더 낫지 않은가?" 이런 주장들은 나름 타당성이 있지만 더글라스 헤이그는 질문이 더해갈수록 더욱더 공세에 대한 확신에 차며 승리를 장담했다.초창기 벨기에 오스텐데로 이를 수 있는 "그럴듯한 기회"는 17년 말에 가면 '''완전한 승리로 얻을 수 있는 "매우 좋은 기회"'''로 바뀌었다. 헤이그의 강한 확신에 로이드 조지는 결국 공세를 거부하는 소기의 목적을 실패하고 만다. 로이드 조지가 전시내각 수상이란 위치에 있음에도 하급자인 더글러스 헤이그를 제어하는데 실패한 이유 중 하나는 그가 보수당 내에서 입지가 약한 것이 문제였다. 로이드 조지는 하원의회에서 보수당원들의 지지에 의지하고 있었고, 그 지지층인 보수당 의원들은 육해군 지도부를 맹목적으로 신뢰했다. 파스샹달 전투 이전에 로이드 조지는 제1해군경 젤리코에 맞서서 호위함대 설치를 강행했다. 그래서 로이드 조지는 해군에 이어 헤이그에 간섭하여 보수당원들의 심리를 자극하는 것에 부담감을 느꼈다. 또한 로이드 조지는 재앙과도 같던 니벨공세 시기 니벨을 지지해서 신뢰를 잃었다. 동시기 헤이그는 니벨 공세의 실패를 예측하여 신뢰도를 얻어가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로이드 조지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겠다고 약속해 권력을 잡은 권력자로써 헤이그가 장담한 '''승리의 유혹'''에 빠지고 말았다. 이시기에 들어선 독일([[카를 리프크네히트]]), 프랑스(조제프 카요[* 조제프 카요는 1911년에서 1912년 프랑스의 총리로 있었고, 독일제국과의 화평을 주장하였다는 이유로 반역죄로 기소되어 3년의 징역형과 5년의 프랑스 본토 거주 금지령, 10년의 프랑스 시민권 박탈이란 중죄를 선고 받았다. 전후 20년대 프랑스 좌파 정권에서 요직을 받아 수행했다가 1944년에 사망하여 라세즈 묘지에 묻혔다.]), 영국([[버트런드 러셀]])[* 세 나라 모두 평화주의자이자 화평론자의 대표격 인물들을 모두 수감시켰다. 카를 리프크네히트는 투옥 후 동부전선 강제 징집, 조제프 카요는 [[푸앵카레]]의 지목을 받은 [[클레망소]]의 지시로 반역죄로 체포 및 기소, 버트런드 러셀도 1916년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해고 후 벌금 및 18년엔 브릭스튼 감옥에서 6개월 옥고를 치뤘다.] 할 것없이 염전 사상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리고 이를 주도한 것은 사회주의자였고 로이드 조지는 승리로서 이런 염전 사상을 억눌러아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한편, 헤이그는 군인으로서의 자질이 다른 명장들과 떨어지는 것과 별개로 정치에는 뛰어났다. 헤이그는 종군기자들에게 취재거리를 던져주고, 사령부를 방문한 의원들을 달래고, 야당인 자유당과 접촉을 유지했고, 당시 국왕 조지 5세의 신임을 얻고 있었다. 로이드 조지가 설사 전시내각의 지지를 받는다고 해도, 로이드 조지가 신임했던 조지 커즌(그 유명한 커즌 라인의 설계자이자 전시내각 당시 상원의장)이 헤이그의 의견을 수용했고, 로이드 조지에 의해 전시내각 고문으로 특별이 들어온 얀 스뮈츠(Jan Smuts, 2차 보어전쟁 당시 보어군 사령관)가 영국 장군들의 편을 들었다. 로이드 조지는 헤이그의 의견을 수용할 수 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더 불행하게도 로이드 조지는 헤이그의 공작으로 인해 이프르 공세를 프랑스인들이 반대했다는 사실(자세한 사항은 밑에 후술)과 헤이그를 제외한 모든 영국 장군들이 공세에 회의적인 것을 알지 못했다. 또한 전시내각은 헤이그 휘하의 모든 정보 참모 부서가 공세에 반대 의견을 낸 것과 런던의 정보부가 더욱 반대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헤이그가 지목한 전장이 '''비와 진흙탕'''으로 가득한 것도 몰랐다. 그러나 설사 안다고 해도 전시 내각은 전시 경제 활동 계획과, 불만찬 노동자를 진정시키고, 호위함대 조직과 전황에 불만을 품은 정치인과 언론을 달래줘야 하느라 민간 각료들은 지친 상태였다. 전장에 대한 정보를 들을 체력이 방전된 것도 전시 내각의 비극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이 시기 로이드 조지는 딸의 결혼식에 참석하느라 회의를 한 번 빠졌다.) 참고로 헤이그의 지지자 중 하나인 로버트슨은 파스샹달 전투가 독일인들을 살육하는 것 말고는 얻는 것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다만 로버트슨은 헤이그의 작전에 의심을 품었어도 로이드조지의 정치적 회피보단 헤이그의 단호한 군사적 행동을 더 좋아했다.] 페르디낭 포슈는 진흙탕과 싸우면서 동시에 독일인들과 싸우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고, 계획된 진격을 "오리의 행진"이라 칭했다. 그러나 이런 반대와 비난은 헤이그를 더 고집스럽게 만들게만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